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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D/Topic]"아버지 뛰어넘으려는 조급증, 화 부를 수 있다"

촛농불 2016. 10. 31. 18:20

[Magazine D/Topic]"아버지 뛰어넘으려는 조급증, 화 부를 수 있다"

[동아닷컴]
“그럼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지난해 중반 서울 서초구 삼성 서초사옥 34층 집무실에서 삼성전자 A 임원으로부터 ‘사업 현안’을 보고받은 이재용 부회장이 대뜸 이렇게 물었다. A 임원은 “최선을 다해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모범 답안을 내놨다. 그러나 이 부회장은 집요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면 어떻게 할 건가요.”

말을 잇지 못하고 당황한 표정을 짓던 A 임원에게 날아든 이 부회장의 한마디는 비수와 같았다. 안경 너머로 눈을 치켜뜨고 A 임원을 빤히 쳐다보면서 “뛰어 내리세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의 얘기였겠지만 비웃음이 섞인 듯한 특유의 웃음기를 머금은 오너 부회장에게 이런 얘기를 듣고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임원은 없을 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삼성전자는 10월 11일 갤럭시 노트7 판매 중단을 공식 발표했다.
이 부회장의 이런 태도는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조직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조직은 얼어붙게 되고 문제가 생기면 남 탓만 하는 풍조를 만든다. 당연히 건전한 소통이 자리 잡을 여지는 없어진다.

삼성 내부에서는 이런 조직 분위기가 갤럭시노트7 단종 사태의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A 임원 사례를 전해 준 삼성 관계자는 “지나친 실적주의에 따라 마케팅 담당 임원들이 분위기를 주도하게 되고 개발 담당 엔지니어들은 ‘출시 시기를 늦추더라도 검증을 더 해봐야 한다’는 소리를 절대 할 수 없는 분위기가 돼버렸다”면서 “이것이 결국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철거를 앞두고 가림막이 처지는 갤럭시 노트7 대형 광고판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의 진단도 비슷했다. 위 교수는 “이번 사태는 마케팅 부문의 주도권에 개발 부문이 휘둘린 결과”라고 지적했다. 시장 선점 효과를 누릴 수는 있는 개발 기간 단축을 밀어붙이다 사고가 터졌다는 것이다. 물론 개발 부문도 그동안 배터리 사고가 없었다고 안이하게 생각하다 대형 사고를 초래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삼성전자는 10월 27일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이재용 부회장을 등기이사로 선임했다.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 부회장이 이사회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권오현 부회장은 이날 “이사회는 급변하는 사업 환경 변화에 대처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이 부회장의 이사 선임과 공식적인 경영 참여를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의 등기이사 선임은 책임 경영 측면에서 진일보한 것이긴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것으로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이 부회장이 실질적인 책임을 지려면 대표이사(CEO)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 주변에서는 이 부회장의 이사회 의장 선임 등의 얘기도 흘러나오지만 이사회는 어디까지나 경영진을 감독하는 기구이지 직접 경영을 맡지는 않는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발표 이후 합병 비율을 두고 논란이 일었을 때 사장단 회의에서 “나는 내 실력대로 평가받기를 원한다”고 언급했다. 우호지분 확보 차원에서 KCC에 삼성물산 자사주 5.76%를 넘기는 것에 대해서도 처음엔 “남들이 볼 때 꼼수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면서 반대했다고 한다. 이 부회장이 자기 말에 책임지는 차원에서도 직접 CEO를 맡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자신의 체제 완비를 위해 사장단 등 대규모 임원 인사를 12월 초에 단행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갤노트7 단종 사태부터 수습해야 한다. 그 출발은 이상 발화 현상의 정확한 원인부터 밝혀내는 일이다. 그래야 정확한 처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후속 제품이 소비자의 신뢰를 다시 얻는 데 필요한 기본 요건이다.

단종 사태로 갤노트7 교환 및 환불에 따른 총 비용과 기회손실만 7조원으로 추산된다. 협력사 부품재고 비용 전액 보상 등의 조치가 이어지면서 손실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국내외에서 소비자들의 집단 소송이 기다리고 있다. 국내보다는 미국에서의 소비자 소송은 기업에 훨씬 더 가혹하다.

위정현 교수는 “2009년 말 도요타 리콜 사태 당시 다급하고 절박한 목소리로 전화했다가 끝내는 비명 소리로 끝난 911 콜센터 녹음 내용을 CNN이 방송하면서 미국인의 공분을 산 것에 비하면 삼성은 그나마 인명 피해는 없었기 때문에 운이 좋은 편”이라고 평가했다. 잘 하면 오히려 삼성에 좋은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다.

“이상 발화 문제가 국내에서만 터졌다면 외부 충격이 원인이었다고 치부하고 그냥 묻혔을 것이다. 삼성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미국에서 터졌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국내에서 그동안 삼성의 의도대로 삼성을 도와주고 삼성에 애정을 보였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삼성이 자기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한 셈이 됐다. ‘미국이 도요타를 견제하려고 리콜을 했듯 자국 기업인 애플을 위해 이번 사태를 주도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사실도 아닐 뿐더러 삼성에도 도움이 안 된다.”

이 부회장은 또 갤노트7 단종 사태를 계기로 삼성전자의 조직 정비에 나서 마케팅과 개발 부문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책임도 떠맡았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아버지를 뛰어넘으려면 실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실적 지상주의의 병폐도 함께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재벌 개혁론자인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노키아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 교수는 현재의 삼성전자가 처한 상황이 2008년의 노키아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2011년까지 13년 동안 휴대전화 시장에서 1위 자리를 지켰던 노키아는 2007년 아이폰이 나온 이후의 위기를 돌파하지 못하고 2013년 9월 휴대전화 사업을 접었다.

“2007년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노키아는 두가지 패착을 두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엉성한 자사의 기존 스마트폰을 업그레이드해 아이폰과 경쟁하기로 결정한 것과 앱스토어 개발을 제때 못한 것이 그것이다. 아이폰과의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삼성전자도 내부 소통을 소홀히 하면 얼마든지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다. 또 단기간에 만회하겠다고 조급하게 굴고 기술적 완벽함 없이 갤럭시 S8을 내놓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박 교수는 궁극적으로 삼성전자의 조직을 슬림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삼성전자는 3월 24일 ‘스타트업 삼성’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조직문화 혁신을 통해 스타트업 기업처럼 빠르게 실행하고 지속적인 혁신을 해나가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새로운 슬로건을 내걸고 선포식을 한다고 해서 관료화된 현재의 조직을 쉽게 바꿀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중장기적으로 엘리엇이 제시한 지배구조 개편도 이 부회장이 풀어야 할 과제다. 엘리엇은 10월 9일 삼성전자의 주주가치 제고 방안 가운데 하나로 삼성그룹의 구조 개편을 제시했다. 삼성전자를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분할하고 삼성물산과 삼성전자지주회사를 합병해 삼성지주회사를 설립하라는 요구다.

엘리엇의 속내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런 구조 개편은 사실 삼성의 숙원이기도 하다. 시장에서는 삼성 오너가가 30% 이상 지분을 보유한 삼성물산을 주축으로 삼성전자 지주회사와 삼성금융지주회사로 재편하는 것이 삼성의 목표라고 관측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지주회사가 금융 자회사를 두는 것을 금하는 현행 공정거래법을 개정해야 한다.

물론 경제민주화 주장이 힘을 얻어가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이번 갤노트7 단종 사태를 계기로 삼성이 수직 계열화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는 것도 부담이다. 수직 계열화를 통한 계열사 간 협업 전략은 더는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혁신적인 외부 기업과의 상생 전략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이 기득권만 포기한다면 쉽게 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이 부회장이 어떻게 결단을 내릴지 주목된다. 그것이 삼성의 지속 가능성뿐 아니라 이 부회장 자신을 포함한 오너 일가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는 주장이 늘고 있다.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