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만난 정윤지(34·가명) 씨는 아웃도어 브랜드 '디스커버리' 매장에서 인기 제품인 '밀포드 다운 재킷'을 입어본 후 그냥 나왔다. 백화점 연말 세일 기간을 맞아 좀 더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인터넷에서 먼저 가격을 검색하고 온 탓에 매장에서 거의 1.5배 가량 높은 가격을 주고 제품을 구매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국정혼란에 빠지면서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연말 특수를 노리던 백화점들이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올해 마지막 세일"이라고 강조하며 대규모 겨울 외투 물량을 쏟아냈지만 온라인몰과의 가격 경쟁력에서 뒤쳐졌을 뿐만 아니라 예년보다 따뜻한 겨울 날씨가 이어지면서 기대만큼 실적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소비심리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소비자들이 씀씀이를 최소한으로 줄이며 지갑을 닫은 탓에 다양한 행사로 '총력전'을 펼쳤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11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95.8로 전월 대비 6.1포인트나 급락하며 7년 7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6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 직후(98.8) 보다 낮은 수치다. 소비자심리지수는 소비자들의 체감경기를 보여주는 지표로, 2003~2015년 평균치인 100보다 낮으면 소비자들의 심리가 비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꽁꽁 얼어붙은 소비심리 탓에 롯데·현대·신세계 등 주요 백화점들의 연말 세일 실적은 각 사가 갖가지 할인 상품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저조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17일부터 이달 4일까지 진행된 백화점 연말 세일 기간 동안 롯데는 작년보다 0.7%, 현대는 1.2% 감소세를 보였다. 이는 2013년 1월 신년세일 이후 3년 11개월만에 역신장을 기록한 것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동안 매출이 롯데 7.2%, 현대 6.3% 증가했던 모습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아진 수치다.
반면 신세계는 이번 연말 세일 기간 동안 매출이 전년 대비 8.9% 증가했다. 이 수치는 기존점포가 아닌 전점 기준으로, 신세계는 올해 강남점 증축 개장, 스타필드 하남, 김해점 등 신규 출점이 많았던 탓에 신장률이 높게 나온 것으로 분석된다.

각 백화점들은 세일 초반쯤만 해도 이번에 역대 최대 규모 수준으로 방한의류 상품전을 선보이는 만큼 매출이 예년보다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소비심리는 백화점 행사장 분위기 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실제로 소공동에 위치한 롯데백화점 본점 9층 행사장에는 주말임에도 예년보다 한산한 모습을 보였다. 1층 화장품 매장 역시 크게 붐비지 않았다.
이 같은 분위기는 각 상품군별 실적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많이 찾는 스포츠웨어(6.2%), 식품(9.2%) 등의 매출은 세일 기간 동안 늘었으나 정장(-6.5%), 리빙(-8.8%) 등 내구재는 인기를 끌지 못해 역신장세를 보였다. 특히 가전은 올해 7~9월에 에너지 소비 효율 1등급 달성 시 10% 환급을 해주는 정책으로 인해 김치냉장고 등 11월에 구매할 상품을 조기 구매한 이들이 많아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롯데백화점 정현석 영업전략팀장은 "올해 역대 최대 규모 수준의 방한의류 상품전을 기획했으나 주말 따듯한 날씨 및 불안정한 국내 정세로 인해 판매 실적이 기대에 많이 못 미쳤다"며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다양한 선물 상품 행사를 준비해 소비 심리를 끌어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순실 게이트'와 '김영란법' 등 여파가 계속 이어지면서 불황에도 씀씀이를 줄이지 않는 고소득층마저 지갑 열기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지속되자 백화점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연말을 앞두고 소비심리를 살리기 위해 일찍부터 크리스마스 마케팅에 돌입했지만 지금은 이 마저도 신통치 않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외 정세 불안으로 연말 특수가 사라지면서 1년 매출이 집중되는 4분기 매출에도 비상이 걸렸다"며 "일찍 연말 분위기를 조성해 소비심리를 되살려 보려고 했으나 소비자들이 목돈이 드는 내구재 소비를 미루는 등 소비 위축 현상만 더 심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현재 분위기는 2014년 세월호와 지난해 메르스 사태 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며 "연중 가장 큰 대목인 연말을 앞두고 터진 국정 혼란 상황이 앞으로 더 지속된다면 백화점뿐만 아니라 다른 유통채널과 외식, 호텔업계 등도 연말특수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